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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 운동

5·18 열흘간의 항쟁(1980.5.1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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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진 이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18일에서 27일 사이에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고, 당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80년 이후에 사망한 사람도 백 명이 넘는다. 군인과 경찰도 26명이 사망했는데, 군사망자는 대부분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고였다.

      이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행한 군사반란(쿠데타)의 연장이었다. 이 군인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항거하면서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군인 집단은 나중에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렸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권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행위에 당당히 맞선 이 열흘간의 항쟁은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이 항쟁을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신군부가 일으킨 내란과 반란 행위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이 전대미문의 국가폭력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역사적 진실이 국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6월 항쟁의 산물인 6공화국 정부는 국민 화합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불순분자의 폭동이나 내란이 아닌 ‘민주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당을 점하게 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의 조사 활동과 청문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자행한 잔혹한 폭력의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가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고, 처절했던 10일 간의 항쟁이 민주주의를 염원한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이었음이 알려졌다.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라고 알려진 광주 문제 관련 특별 성명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이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 정부”라고 규정하였다. 열흘간의 항쟁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숭고한 시민운동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다.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면서 당시 학살과 인권 유린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광주의 피해자 단체를 비롯한 전국의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는 1995년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등 가해자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5-97년에 걸쳐 이루어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가해자 15명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화와 정의 실현을 위한 열망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에 대한 결심 판결에서 신군부는 국가를 전복하여 정권은 탈취할 목적으로 결성한 내란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반해 광주 시민의 항쟁은 이러한 내란 세력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헌정 질서 수호 행위로서 법적,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가해자 정권 시절에 내란, 폭동으로 매도되던 사건이 숭고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민주화운동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셋째, 5‧18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저항권의 정당성과 나아가 그 저항권 수호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달리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시민의 ‘무장투쟁’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7년에 우리나라 대법원은 초법적인 군부 집단에 맞선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행위는 불법적인 폭동이 아니라 저항권에 기초한 시민 불복종 행위이자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비록 우리나라 헌법에서 국민의 저항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재판부의 이러한 인정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법정신과 부합함을 확인해주었다.

      넷째, 열흘간의 항쟁 기간 중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치 공동체 정신은 시민의 자발적 협동과 이타적 나눔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사회 질서 유지의 기본 원리임을 증명하였다. 경찰과 행정 등 정부의 기능이 일시 정지된 상태에서도 광주에서는 강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민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평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헌혈’과 ‘주먹밥’은 바로 이 경이로운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으며, 국가 차원에서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교과서에도 이 내용을 수록했다. 희생된 분들이 묻힌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항쟁의 현장은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5‧18 정신을 반영한 헌법전문 개정안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 5‧18민주화운동은 엄청난 왜곡과 폄훼의 대상이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하에서 이러한 왜곡과 폄훼는 더 극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일으킨 내란으로 매도되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북한군 수백 명이 몰래 침투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광주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7년의 사법부의 판결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학살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궤변을 주장함으로써 희생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국가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국민들 앞에 그 역사적 의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진상규명”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19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정확히 몇 명인지, 5월 27일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그곳에서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등에 대한 핵심적인 진상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8년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 사건의 진상을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활동이 추진되고 있다. 이 진상규명 작업을 토대로 이 열흘간의 항쟁은 민주화운동, 시민불복종운동, 아름다운 공동체 운동으로 국민들 앞에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