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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오월을걷자

오월길

오월인권길

다양한 유형별 5·18사적지를 통해 내가 원하는 답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의미 : 항쟁의 불씨가 도심으로 번져가던 길
  • 총거리 : 약 6.7km
  • 소요시간 : 약 1시간 50분
  • 코스
전남대학교 정문<사적 1호> 광주역 광장<사적 2호>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옛터<사적 3호> 5·18 최초발포지<사적 21호> 광주 MBC 옛터<사적 7호> 녹두서점 옛터<사적 8호> 광주 YWCA 옛터<사적 6호> 금남로(5·18기록관)<사적 4호> 광주YMCA<사적 5-4호> 구 상무관<사적 5-3호> 5·18민주광장<사적 5-2호> 도청과 5·18민주광장<사적 5-1호>
1전남대학교 정문<사적 1호>
5·18민주화운동 최초 발원지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다. 계엄군은 5월 18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정문앞에 모인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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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광주역 광장<사적 2호>
무자비한 살육 앞에 나도 광주시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고 21일 아침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주검을 옮겨오자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 만 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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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옛터<사적 3호>
계엄군에 의해 피로 얼룩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5월 19일 오후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계엄군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하여 시민들에게 총검을 휘둘러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통해 시외로 나간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전파되어 항쟁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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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8 최초발포지<사적 21호>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하다
5·18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곳이다.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하여, 조대부고에 다니던 김영찬 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발포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 투쟁이 한층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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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광주 MBC 옛터<사적 7호>
왜곡보도, 시민이 심판하다!
계엄 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MBC와 서석동 광주세무서 건물에 불길이 타올랐다. 다음날 새벽에는 광주역 앞 광주KBS 건물이 불탔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과 언론의 왜곡에 대한 항의와 응징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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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녹두서점 옛터<사적 8호>
항쟁대책 논의장소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1980년 5월 17일 밤 전국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 검속되자 청년 학생들이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을 논의한 항쟁의 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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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광주 YWCA 옛터<사적 6호>
항쟁의 산실
광주 여성운동의 산실이자 19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냈던 장소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인사들은 이곳에서 시민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졌고, 투사회보(민주시민회보)를 제작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이곳은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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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금남로(5·18기록관)<사적 4호>
항쟁·민중·민주의 거리
1980년 5월 18일 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고 5월 19일부터는 수많은 시민들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와 버스를 중심으로 100여대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수십 만의 시민들이 매일 모여,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촉구했던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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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광주YMCA<사적 5-4호>
60년대 이후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 집회를 열었던 곳.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기 위해 자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훈련을 실시했으며, 항쟁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이곳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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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 상무관<사적 5-3호>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된 주검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과 집단 발포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모셔놓고 통곡하며 분노했던 곳이다. 항쟁기간 동안 시민들은 상무관 앞 빈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지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민주화투쟁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계엄군이 점령한 뒤 5월 29일, 상무관에 모셔져 있던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시립묘지로 옮겨져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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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8민주광장<사적 5-2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특히 5·18 사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분수대와 30여년 만에 복원돼 제자리로 돌아온 5·18시계탑으로 인해 5·18민주광장은 시민들의 피끓는 함성이 울려퍼지던 옛 전남도청 앞 현장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되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에는 5·18시계탑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차임벨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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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도청과 5·18민주광장<사적 5-1호>
가자, 도청으로! 최후의 결사항전지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다. 시민·학생수습위원회 활동이 있었고, 시민공동체 활동의 중심이었다. 또한 이곳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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