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걷자

광주 사적지(29개소)



제1호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
전남대학교 정문
광주 북구 용봉로 33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는 용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어 학생들의 도심 진출을 저지하는 경찰의 통제선이 이 다리 부근에 설치되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전국의 주요 장소들에 계엄군이 배치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계엄군은 그 전부터 각각의 목적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남대학교에는 전북 이리에 주둔하던 제7공수여단 제33대대가 배치되었다. 공수여단은 학내를 수색하여 학생 수십 명을 폭행․구금했고, 무장 대원들로 출입문의 경계를 세웠다.

 

 일요일이었던 5월 18일 아침 7시경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학교에 왔다. 학생들은 공부하기 위해 또는 5월 16일 전라남도 도청 앞 ‘민족ㆍ민주화성회’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등교했다. 학생들은 계엄군의 제지로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계엄군의 위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10시경이 되자 정문 앞에는 200여 명이 모였으며, 계엄군은 2개 지대가 증원되어 4개 지대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말로 또는 노래와 구호를 부르며 항의했는데, 계엄군은 이들을 막무가내로 밀어냈다. 시간이 흐르자 일부 학생들이 돌멩이를 던졌고, 계엄군은 이들을 골목과 상가 등에까지 쫓아가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신분을 밝힌 교수도 폭행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동문(또는 후문)에서는 지나던 시내버스에 탑승한 학생들이 계엄군의 진압방식에 항의하자, 이들을 폭행하고 교내로 끌고 갔다. 계엄군의 진압방식은 불과 며칠 전 정문에서 경험했던 경찰의 진압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폭행과 실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며칠 전에 이동했던 경로, 즉 광주역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경유해 금남로로 들어섰고, 광주가톨릭센터 인근까지 나아갔다.


 전남대학교 정문과 동문에서의 계엄군과 학생 및 시민의 충돌은 이후에도 수차례 발생했다. 20일에 증파된 제3공수여단이 전남대학교에 주둔하면서 제33대대는 조선대학교로 이동했다. 제3공수여단에게는 광주역 일대의 경계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시위대의 항거를 견디지 못하고 21일 새벽 4시 30분경 전남대학교로 철수했다. 이때부터 제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이동할 때까지 전남대학교 일원에서는 시민들의 거센 항거가 전개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와 민가에 발포하여 임산부 최미애를 비롯해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제3공수여단이 철수한 다음날인 22일 전남대학교 교정에서는 매장된 시신들과 폭행 및 고문한 현장들이 발견되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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