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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오월을걷자

오월길

오월남도길

다양한 유형별 5·18사적지를 통해 내가 원하는 답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의미 : 전남 도민의 연대와 지원이 도내 전역으로 확산되는 길
  • 코스
해남 강진 영암 나주 화순
1해남
완도와 진도군민에게도 항쟁을 확산시킨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
해남군청 앞 군민광장은 당시 해남군민에게 5·18을 알린 최초의 장소이며 많은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를 위한 집회를 자주 열었던 곳이다. 또한 시민들이 해남경찰서를 점거하고 자체 시위대를 편성, 군부집단에 항거하였으며, 완도와 진도군민에게도 항쟁의 불을 붙이는 등 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킨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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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진
조직적인 시위와 항쟁을 이어가다
강진지역의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21일 광주를 빠져 나온 시위대가 7, 8대의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진입하자 경찰이 자진 철수하여 무력 충돌은 없었으며, 이미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일을 알고 있던 많은 군민들이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위대들은 강진읍 교회에 본부를 두고 여신도들이 지어준 밥을 먹고, 날이 저물면 강진읍 교회와 남도장 여관에서 숙박을 하면서 버스터미널, 군청 앞 등지에서 상당히 조직적인 시위 및 항쟁을 하였다. 5월 23일 강진농고생 500여 명이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등 지역 청년,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가세하여 시위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당시 도립병원(강진읍 남성리, 현 강진의료원)에서는 5월 23일 아침에 발생한 해남우슬재 사건으로 부상당한 총상자 2명 및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5월 24일 시위대와 청년들이 합세하여 장흥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강진지역에서의 시위가 종료되었으며, 시위 도중 부상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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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영암
광주의 시민군을 돕다
처음 항쟁활동이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21일 정오경 광주방면에서 신북공영버스터미널과 영암읍 입구에 들어온 차량 시위대로부터 광주에서의 계엄군의 만행을 전해 듣고 차량 시위 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때 영암군의 일부 시위대는 광주 진입에 성공하여 시민군으로 활동하였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진입을 차단당한 영압읍·신북면·시종면 출신 수십명의 시위대는 버스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의 플래카드를 부착하고 수차례 광주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980년 5월 22일 17시 30분 경 시정지서 뒷산에서 획득한 300여 정의 소총을 나주군청에 집결하여 광주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시위 군중에게 전달했다. 1980년 5월 23일 오후에 영암 지역 유지와 청년들을 중심으로 총기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자체 수습에 나섰다. 이 때부터 영암군 지역의 5·18민주화운동은 진정국면에 접어들었고,1980년 5월 24일부터는 계엄군이 영암읍에서 강진군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차량을 통제하는 한편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색출하여 약 50여 명을 체포 구금하고 조사를 마친 후 상무대 영창에 입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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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나주
전남 서남부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다
니주는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 치하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이후, 5월 19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학살 만행 소식을 접한 나주시민은 항쟁에 적극 동참하였다. 나주시민은 일제히 봉기하였고 5월 21일 계엄군과 맞서고 있는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나주경찰서 무기고와 영강파출소 예비군 대대본부 무기고를 부수고 기관포 2문, 소총 1,000여 정, 실탄, 수류탄 등을 획책하였다. 이 중 기관포 2문, 총기 900여 정과 실탄, 수류탄을 광주 시민군에게 지원하여 계엄군과 대치하게 하고 나주시민은 소총으로 무장하여 영암, 해남, 함평, 무안 등지를 순회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소식을 전남 각 지역에 전하고 시위에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권했다. 이는 전남 서남부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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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순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화순군민들이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해 5월 21일 오후 6시와 10시 사이, 수많은 청년들과 예비군들이 각 지역으로 무기를 구하기 위해 화순군청 광장에서 출발했다. 화순군민들은 화순역전 파출소에서 총기 750여 정과 실탄 6백 여발을 획책하였고, 시민군들에게 빵과 음료수 등을 제공했다. 화순광업소에서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성전 씨 등 화순군 출신 청년 13명이 21일 밤 9시께 8톤 트럭 7대 분에 화약 2천 6백 49상자와 뇌관 355개 도화선 4천 6백 미터를 싣고 광주로 출발하여 이튿날인 22일 7시 경 광주시 지원동에서 대기 중인 광주 시민군 측에 넘겨 주었다. 다이너마이트가 전남도청에 들어가자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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