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서가, 시네 콰논 ( * Sine Qua Non ) | |
작성일 : 2021-12-28 조회 : 403 | |
오월서가, 시네콰논(Sine Qua Non) * 시네 콰 논Sine Qua Non 은 라틴어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광주에는 특색있는 독립서점들이 많다. 야생화처럼, 혹은 레지스탕스처럼 저마다의 힘으로 발아해 길목에 뿌리를 내리고 독자들과 공생하며 뻔하지 않은 향기를 내뿜고 있다. 독립서점 탐방이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Writer 정원선 에세이스트 Photographer 이규열. 조은영 수상한 사람들, 항쟁의 마지막 밤에 모이다 2021년 5월 26일 밤 11시 40분. 소나기가 올 모양인지 먹구름이 잔뜩 낀 밤이었다. 옛 전남도청 본관 앞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여럿 모였다. 그들은 익숙한 듯 천막을 치고,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원형으로 간이 의자를 깔았다. 휑뎅그렁한 광장을 눅눅한 바람이 거칠게 휩쓸고 있었다. 인적은 드물고 차량 통행마저 뜸해 사방이 교교했다. 한 사람이 가방을 열어 두꺼운 인쇄물을 꺼내 머릿수대로 한 부씩 나눠주었다. 종이뭉치를 받은 이들은 제각기 휴대폰 조명을 켜서 캄캄한 가운데 내용을 확인했다. 가끔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시계를 봤다. 마침내 자정이 되자, 한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특유의 부드럽지만 낭랑한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수상한 모임의 개회를 선언했다.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적막한 광장에 손뼉 소리가 짝짝짝, 메아리쳤다. 이상하게도 건물이나 나무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오월 광주 열흘간의 항쟁 순례길, 그 마지막 행사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모인 이들은 겸연쩍은 듯,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대학생, 성 소수자 모임 대표, 기자, 취업준비생, 자영업자, 회사원, 여행자 등 다양한 연령과 성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나이가 많아 어딘가 살짝 불편해 보이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이맘때면 거의 잠들지 못하는 늙은이라고 말했는데, 그러자 사회를 맡은 이가 곧바로 직전의 소개를 바로잡았다. 그들은 41년 전, 바로 이곳에서 계엄군과 끝까지 맞붙었던 이들이었다. 사람들의 눈빛들이 형형해졌다. 소개를 마친 후, 그들은 인쇄물을 한 단락 씩 윤독했다. 박효선의 희곡 **금희의 오월 필사본이었다. 두 시간 넘게 극본을 나눠 읽는 동안 종종 비가 쏟아졌다. 찬 바람까지 겹쳐 천막 안으로 장대비가 들이치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두운 와중에 휴대폰 불빛에 기대 더듬더듬 활자를 읽어가는 일이 지칠 법도 한데 하나같이 또랑또랑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지난 열흘 내내 5·18 사적지를 걸어서 답사한 후였는데도 그랬다. 참여 소감을 묻는 사회자에게 여대생 한 명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인 데, 전년에 처음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제 인생이, 가치관이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 올 수가 없었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미소지었다. 밤이 이슥했으나 행사는 계속됐다. ![]() 이 행사의 사회자이고, 열흘간의 항쟁 순례길의 진행자이며, 전체적인 기획자는 독립서점 ‘소년의서’를 운영하는 임인자씨다. 해마다 그가 5월 27일, 밤샘 행사를 개최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그날이 41년 전, 항쟁의 마지막 밤이었던 까닭이다. 짐작컨대 이 행사는 그날 광주 시민들을 대신해 죽은 이들을 향한 추모제인 동시에, 일종의 계승식일 것이다.
‘소년의서’는 인문사회과학예술 전문책방으로 그중에서도 지역(광주)과 5·18, 연극영화학에 특화되어 있다. 충장로 광주극장 옆에 자리한 서점에서 그는 토박이 노포들의 애환을 『충장로, 오래된 가게』라는 책으로 풀어쓰기도 했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지역 발간 도서나 한정판 책, 절판본도 여기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광주를 아끼고, 이웃과 늘 어깨동무하며, 지역의 부름과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헌걸찬 책방을 보고 있자면, 문 닫은 서점 하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못한 책방, 녹두서점 딱 4년간 운영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끊임없이 현현하는 슈뢰딩거의 책방이 있다. 바로 녹두서점이다. 책 점 옛터인 동구 장동 55-7번지에는 5·18 제8호 사적비가 놓여져 있다.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현장이었다는 뜻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점이. 심지어 규모도 고만고만하고, 새 책만 팔았던 것도 아닌 헌책방을 겸한 낡고 영세한 점방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고 전남대에서 제적까지 당한 김상윤(현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은 1977년 계림동 책방골목에 녹두서점을 연다. 그는 민중의 힘은 갑자기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키우는 것이라 생각해서 더 나은 시대를 공부하고 준비하는 마중물로 사회과학서점을 떠올린 것이다. 녹두서점은 이윽고 전남대 교수와 학생이 시국 모임을 여는 사랑방이 되고, 노동자와 대학생이 함께 가르치며 배우는 들불야학의 산실이 된다. 여기서 역사에 새겨진 여러 이름이 나온다.
박관현(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윤상원(5·18 도청 항쟁 시민군 대변인), 박용준(항쟁 기간 유일한 언론이었던 ‘투사회보’ 제작), 박효선 등이다. 불법 딱지가 붙었으나 비밀리에 유통되던 금서를 찾아 광주뿐 아니라 전남 전역에서 방문하는 아지트로서도 입소문이 난다. 1979년 박정희가 12·12사태로 피살된 후, 전두환이 정권을 잡겠다고 시범 케이스로 광주를 피바다로 만드는 ‘화려한 휴가’를 시행하기 전날인 1980년 5월 17일, 군경은 예비검속의 일환으로 주요 민주 인사들을 모조리 잡아 가뒀다. 김상윤도 그렇게 5·18 전날 밤에 지프차에실려 보안대로 끌려갔다. 교사였던 아내 정현애(현 오월어머니집 이사장)는 남편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덜덜 떨면서도 이튿날 시동생 김상집(현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지부장)과 함께 다시 서점을 열었다.
녹두서점은 그날부터 밤새 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피해 현황을 수소문하며, 가족 단위가 아닌 시민사회 차원에서 구속자들의 후원과 변호를 담당하는 대책사무실로 변한다. 이날부터 계엄군이 본격 진압에 나서자 광주 상황을 공유 전파하고 시간대별로 일지를 기록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는 5·18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외, 창비, 1985)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1981년 정권의 강압으로 폐업 당했지만. 녹두서점은 이후로도 5·18의 진실을 알리는 구심점으로서 끈질기게 호명되었다. 21세기의 산물, 독립서점의 출현 1980년대까지는 동네마다 작은 서점들이 많았으나 대형서점들의 선전으로 점점 어려움에 처한다. 규모에서, 설비에서, 장서수에서, 동네 서점들은 대형서점과 경쟁이 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1995년 인터넷서점(아마존)이 본격적으로 출범하면서 작은 서점들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대형서점들과 인터넷서점들의 격전장에서 매일 동네 서점들의 폐점 소식이 들렸고, 작은 책방들은 점점 갈 곳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책 점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속절없는 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무모한 희망을 품었다. 크기나 장서 수로 승부하기보다 색다른 콘셉트와 각별한 기치에 중점을 두고 가게를 열었다. 이른바 독립서점이다. 그들은 천편일률이었던 동네 서점과는 달리 특성화를 내걸고 문화의 지역 거점으로서 소통을 추구(community)했다. 독서모임과 저자 강연회를 열고, 커피 또는 맥주를 함께 팔기도 했다. 대형서점이나 도서관의 분류표준인 ‘한국 십진분류법’을 거부하고 저만의 기준으로 서가를 꾸렸다(curation). 점주의 개성이 또렷했고, 전반적인 디자인이 고유했으며 책 띠를 만들어 자신이 인상 깊었던 문장을 적어놓는 등 서적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방식도 달랐다. 많은 책을 팔기보다 자신이 꼽은 좋은 책을 팔길 원했다. 공간에 오래 서성여도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다채로운 모임을 개설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였다(convening). 트렌드가 바뀌며 카페에 가듯 사람들은 독립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의 서점은 2,000여 곳에 달한다. 그중에 551곳이 독립서점이다(파이낸셜뉴스 20210621기사 “어느 서점 주인의 1년, 그의 용기에서 배운 것” 참조). 5년 전까지만 해도 100곳에 미치지 못하던 인디 책방이 다섯 배나 늘어났으니 독립서점은 이제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서점 같은 업계 강자들의 파워게임 속에서도 공존의 방안을 찾았다고 봐도 좋겠다. 독립출판물을 내고,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며, 창의적인 굿즈(goods)를 내놓는 등 각종 이벤트가 수시로 열리는 독립서점은 이제 지역의 명물이 됐다. 배우나 연예인, 작가가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것도 더 이상 드물지 않다. 일종의 밈(meme)이 된 것이다. 독립서점은 예전의 동네 책방과도 다르고, 대형서점의 로컬매장과도 차별화하며 스스로를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년간 국내 출판계를 휩쓴 가장 큰 변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독립서점이란 뭘까. 저마다 개성이 다른 수많은 인디 책방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묶을 수 없다. 거칠지만 이렇게 퉁칠 수는 있겠다. 카페와 수제 맥주집과 미술관과 공연장과 세미나실과 전문책방을 합친 것, 혹은 그 이상이 독립서점이라고. 예전에 책방이 책을 필요로 하는 학생과 독서가들의 신성한 예배당이었다면 지금 독립서점은 2030 세대의 그들만의 놀이터, 책을 매개로 감성과 취향을 발견하고 온오프로 공유하는 소규모 클럽이라고.
![]() 야생화의 DNA를 가진 광주의 인디책방들 광주의 인디 책방들도 앞서 말한 커뮤니티(community), 큐레이션(curation), 회합(convening)이란 독립서점 고유의 열쇳말을 간직하면서 저마다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중이다. <검은책방흰책방>은 광주 유일의 문학 전문서점으로 작가들의 북 토크, 낭독회, 다양한 독서모임들이 수시 열린다. 사진가가 운영하는 <리을피읍>은 다양한 사진집을 두루 갖춰놓았고 연중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한다. 광주고 앞 <문학서점>은 계림동 헌책방거리를 2대째 지켜온 일원으로 새 책뿐 아니라 헌책 행사도 빠뜨리지 않는 친밀하고 다감한 공간이다. <타인의 책-지음책방>은 뚝심이 남다른 곳으로 매년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책만을 판매하며 글쓰기 프로젝트 같은 심도깊은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책과생활>은 독립출판물을 발행하는 출판사와 비건 베이커리 카페를 겸한다. <책인클래스>는 카페와 미술관을 한몸에 구현한 듯한 모습이다. 책 속 문장으로 수를 놓아 컵 받침을 만드는 등 예술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사이시옷>은 온라인 독서모임을 주도하는 북카페로 표현의 방식까지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창작 프로그래머 역할을 맡고 있으며, <러브앤프리>는 매장과 모임방이 별도로 나누어진 복합문화서점으로 영업시간에는 책을 판매하고 영업시간 후에는 모임방에서 다채로운 소모임을 주최한다. <파종모종>은 출판편집과 공연디자인까지 고민하는 심도깊은 출판전문학교로 발돋움하는 그야말로 ‘서점출판융합의 모범 사례’다.
<동네책방 숨>은 서양식 2층 주택을 카페바 겸 서점으로 운영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경험을 공유하려’는 아름다운 고집이 돋보이는 넉넉한 책방이며, <인공위성>은 광주뿐 아니라 전남 목포의 도서모임까지 이끌며 독자들에게 수업의 개설 권한을 이양한 독자 민주주의 책 점이다. <예지책방>은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그림책 전문점으로 그림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세밀하고 알찬 것으로 이름나 있으며, <산수책방 꽃이 피다>는 식물과 원목 가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넓고 편안한 북카페로 지역 예술가들의 전시장도 겸한다. 그밖에도 광주에는 특색있는 독립서점들이 많다. 광주라 해서 주민들이 특별히 더 많은 책을 읽는다는 근거는 없으므로, 광주의 인디책방들은 야생화처럼, 혹은 레지스탕스처럼 저마다의 힘으로 발아해 길목에 뿌리를 내리고 독자들과 공생하며 뻔하지 않은 향기를 내뿜고 있다. 독립서점 탐방이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립’이란 늠름한 레테르를 달고 있지만 사실 독립서점의 살림은 넉넉치 않다. 손쉽게 무료로 접하는 실시간 영상 컨텐츠가 손아귀에 펼쳐지는 시대, 종이책을 팔아서 생활의 방편을 삼는 일은 여전히 험난한 모험이다. 그 쉽지 않은 일상 속에서 인디책방들은 자신의 공간을 할애하여 오월서가란 프로젝트에 함께 하기로 한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도서들을 전시하고, 관련 자료와 기념품까지 아울러, 쉽고 친근하게 오월 그날과 오늘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이다. <파종모종>을 운영하는 양지애 대표는 책방들이 이어받고자 하는 뜻이 ‘녹두서점’에서 비롯하였고, 5·18을 ‘지금의 삶 속에서 우리의 방식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저 멀리 시대에 뒤처진 은하계 서쪽 소용돌이의 끝,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변두리 지역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노란색 항성이 하나 있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첫 문장 대우주 변두리의 노랗고 쬐그만 항성이 태양이고, 지구란 혹성은 그 태양계에서도 다시 또 언저리에 위치한 따라지별이다. 그 따라지별에 기생하는 시시한 미물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듯 크게 보면 인간은 보잘것없는 개별적 존재다. 허나 우리가 그저 각각의 운명만을 위해 경쟁하고 분투하는 개인인 것만은 아니다. 41년 전 그날이 알려준 것도, <녹두서점>의 운영진들이 몸소 실천한 것도, 빛고을 인디 책방들이 오월 서가에 함께 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날까지 오월서가 들은 담쟁이처럼 서로를 엮으며, 혹은 질경이처럼 무리 지어 거리에 드러누워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가치를 옹호하며 무장무장 새로운 풀씨들을 퍼뜨릴 것이다. 인류사의 누군가는 늘 그랬듯이, 묵묵하게 또 덤덤하게. 오월서가 2020년 5·18기념재단이 기획한 오월서가 프로젝트는 5·18을 주제로 서점들을 별자리처럼 연결해 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인디책방들이 5·18항쟁을 다룬 도서들을 함께 전시하고, 관련 자료와 기념품까지 아울러, 쉽고 친근하게 오월 그날과 오늘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2021년 오월서가 는 광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지역 서점들도 참여했다. <굳즈展>에는 광주 14곳, 전국 35곳의 인디서점들이 참여했는데 기간은 5월 18일부터 약 2개월 정도지만, 기획전이 끝나는 것일뿐 오월서가 자체는 연중 상시 운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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