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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상무지구
작성일 : 2021-12-28     조회 : 474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상무지구 첨부파일 : 04-01.JPG


광주 최고의 도심인 상무지구는 ‘상무대’가 있었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다. 예전 상무대 사진과 지금의 상무지구를 사진을 함께 
놓고 본다면, 그 두 곳이 같은 곳임을 짐작할 이는 많지 않다. 
이런 변화는 1994년 장성으로 상무대가 이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혹시 상무지구에 간다면 그곳에 남아있는 기억의 장소들, 
꼭 한번은 들러보시길! 

Writer 정원선 에세이스트 Photographer 이규열


모란꽃 피는 계절

서구 쌍촌동에 자리한, 새로 올린 광주시청 빌딩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5·18기념공원은 본디 여의산(如意山) 자락을 일궈낸 곳인데, 거기 산마루에는 무각사(無覺寺)라는 절집이 한 채 있다. 이 법당은 본래 군인들의 병영사찰이었으며, 여의산 또한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상무대(尙武臺)라는 대규모 군사교육 시설이 광주 중서부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상무지구라는 일대의 명칭은 여기서 비롯한다.

말뜻 그대로 풀이해 보자면, ‘상무란 무력을 숭상한다는 뜻이고, ‘여의란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무각이란 불교용어로서 깨달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숨 쉬듯이 매 순간에 각성이 함께 하니 깨닫는 것조차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 뜻풀이를 교묘하게 빗대어 쓰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들이 작지 않은 울림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4년에 상무대가 전남 장성으로 옮겨가면서 이 일대가 공원으로 탈바꿈했는데, 무각사만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민간사찰로 변했다.

무력을 숭상하던 이들은 떠났고,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산은 재조성되었으며, 깨달음만이 오롯이 남았다. 세월이 흘러 도심 공원과 사찰은 지역민들의 끈끈한 사랑을 받고 있어 주변 공영주차장은 매일같이 몸살을 앓는 지경이다. 다채로운 초목들이 굽이굽이 울울창창한 5·18기념공원은 원래 병영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다.

봄이면 파릇한 연둣빛 물결 속에서 아롱다롱 일어나는 화초들이 그야말로 야단법석인데, 특히 오월에는 무각사 주변이 장관이다. 정문과 불당 곳곳에 진득하다 못해 호사스런 모란이 그야말로 뭉게뭉게 솟아난다. 당장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홍모란이 대번 눈길을 끌지만, 그 한편에서 가만가만 하늘거리는 백모란도 차분하니 마음을 조인다. 상춘객들은 무각사를 중심으로 공원을 한 바퀴 크게 도는데, 아침저녁의 어스름할 무렵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내 절집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곤 한다. 모란꽃들의 군무가 공연되는 까닭이다.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얇고 가느다란 꽃 이파리들이 빛을 따라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어딘가 애잔하여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꽃의 왕이란 별명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이 꽃에 향기가 없다는 옛말이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은은하지만 분분한 꽃내음을 자아낸다. 꽃대가 작약과 비슷한데, 모란은 그러나 꽃이 아닌 나무이며 작약보다 일찍 피고 또 서둘러 져버리면서 서로 구분된다. 꽃말은 부귀, 일찍이 궁궐과 종묘에서도 애용했으며 동양화의 정물로도 자주 쓰였다. 그러니까, 모란은 꽃 중의 꽃이며, 풍요롭고도 존귀하고, 또한 두루 사랑받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싯귀처럼 꽃은 열흘을 못 갔지만 그랬다.

서구의 영향으로 오월 하면 장미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예부터 오월은 모란의 계절이었다. 굳이 김영랑의 시를 빌리지 않더라도.무각사의 모란꽃에서 눈을 돌려 넓게 5·18기념공원, 더 나아가 공원이 자리한 상무지구를 얼마 전 모란꽃 피었던 한 시절로 되비쳐 보려 한다. 군대가 들어왔다 떠나고 그 자리가 사적지로 바뀌는 격변 혹은 개벽이 여기 여의산 자락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변화가 토목적인 것만도 물론

아니다. 떨어진 이파리를 한 장 한 장 그러모아 마침내 한 송이 꽃을 재현하듯, 상무지구의 내력을 재구성하여 지금의 찬란한 야경이 빚지고 있는 한 사람의 어두운 밤을 밝혀낼 작정이다. 시간을 거슬러 일단 백 년 전으로 가자.



광주 도심 100년의 내력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전라도에서 제일 큰 촌락은 나주였다. 작은 군 정도에 불과했던 빛고을이 나주를 밀어내고 호남의 대표 도시가 된 데에는 간단치 않은 사연이 있다.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지금의 정읍) 농민들이 수탈과 폭정을 바로잡고자 민란을 일으킨다.

놀란 조선 왕정은 외세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가 물러나고 일본이 득세했으며 서구 열강도 지원과 견제를 빌미로 내정에 끼어든다. 봉기한 농민군을 총칼로 찍어누른 후 조선은 시늉이나마 개혁을 내세우며 소극적으로 적폐를 고쳐보려는데(甲午改革, 1895년) 명성왕후가 일본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백성 대다수가 반대하는 단발령까지 공포되며 민심이 다시 흉흉해진다.

이에 나주에서 의병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부 관찰사까지 처단하는 사건(乙未義兵)이 터지자 당시 관찰사(현재의 도지사)였던 친일파 윤웅렬이 겁을 먹고 관찰부(현재의 도청)1896년에 광주로 옮겨버린다. 원 전남도청 위치인 금남로 끝자리다.

빛고을은 어느 날 갑자기 호남의 행정수도가 된 셈이다. 근대국가를 표방한 일제가 이후 관찰부를 도청으로 개편하고 행정력을 집중시키며 광주는 바야흐로 대도시(metropolis)로 자리매김한다.

 

해방 후 빛고을은 호남의 확고한 제1 도시가 되고, 광주 전역은 인구가 폭증한다. 그중에서도 도청 부근은 핵심 구역이었다.

장장 100년간 눈부신 변화를 거듭한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는 기차역, 은행, 상가, 법원, 백화점, 경찰서, 공원, 터미널에 4년제 대학과 종합병원까지 근대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걸 갖춘다. 주민들은 도청에 가면 사고팔고 해결하고 쉬고 먹고 공부하고 치료 받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심에만 사람이 몰리자 기능을 나눠 광주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킬 부도심을 신설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광주의 어느 곳에 신도시를 건설해야 할까?

 

지도만 봐도, 빛고을의 서쪽은 무등산이 크넓게 솟아있어 불가능한데. 부도심으로 개발할만한 넓고 주인 없는 땅을 찾기도 어려운데.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은 1984년 광주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상무대를 옮기라 지시했고, 이에 국방부는 1989년 전남 장성 이전을 공표한다. 광주직할시(현재의 광주광역시)는 그 일대를 정부로부터 매입, 혹은 양여받으며 개발을 추진해 2003년에 계획도시의 준공을 완료한다.

시청, 공기업, 민간기업체, 언론사, 금융기관, 문화체육시설, 광장, 순환도로, 대형휴식공원까지 망라한 신흥 개발지구의 이름은 그 자리에 있었던 군부대의 이름을 따서 상무지구가 된다.

 





상무지구, 광주의 신흥 핫 플레이스

광주에서 약속을 잡는다면,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이 질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보통 외지인이다. ? 광주야 답이 뻔하니까. 광주극장, 제일백화점, 충장서림, YMCA , (도청)시계탑, 충파(충장파출소), 우다방(정말 많은 사람들이 약속장소로 삼는다고 충장로 우체국을 우체국다방이라 불렀다), 가톨릭센터……. 광주에서 만남의 광장20세기 내내 도청 주변이었다.

한 번도 변한적 없다. 2003년 상무지구가 완공된 이래, 앞의 질문은 새로운 답을 얻는다. 고층건물이 앞다퉈 올라서서 야경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정비된 도심 공원이 곳곳에 숨 쉬고 있으며, 구역별로 특성화된 상가에 반듯한 가게들이 늘어선 신시가지가 대안으로 떠오른 거다. 서울의 강남, 부산의 해운대처럼 상무지구는 곧 뉴 노멀(new norma)l’이 된다.

도로 접근성이 떨어지고 기업 입주가 늦어진 준공 초기에는 상업영역만 오롯하여 상무엔 술집만 있다는 악평을 받기도 했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는 유동 인구수와 상권매출액에서 도청 부근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메가박스 영화관부터 롯데마트까지 이어지는 상무번영로, 이른바 젊음의 거리CGV 영화관에서 라마다 프라자 광주호텔까지의 상무연화로, 이른바 비즈니스 거리는 주간보다 야간 통행량이 더 많을 정도로 불야성을 이룬다.

평일 낮에는 업무 지구로 기능하지만, 저녁이나 주말에는 유흥오락 지구로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처음엔 부도심 기능을 기대하고 상무지구를 건설했으나 지금은 원도심을 대체하는 주도심으로 자리잡았다. 광주의 한복판에 해당하여 어디서나 가까운데다 주거와 행정, 산업, 금융, 언론, 상업, 여가 기능까지 촘촘히 덧붙여지며 자족도시로 거듭났다.

 

예전엔 광주에 여행온다면 대개가 광주역이나 유스퀘어, 무등산 주변에 묵곤 했지만 지금은 상당수가 곧바로 상무지구로 온다. 특급호텔에 숙박해 사통팔달 터져 있는 도로망으로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업무를 보다 저녁이면 돌아와 밥과 술을 해결한다. 외지인만 그런 게 아니다. 광주 지역민들도 상무지구로 출근해 일하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세련된 가게를 찾아 한숨을 돌린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드넓은 공원을 거닐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며 여유를 만끽한다.

 

이제 여기는 광주 사람이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찾아오는 지역 최대의 번화가가 되었다. 20년 전의 상무대 사진과 지금의 상무지구를 사진을 함께 놓고 본다면, 그 둘이 같은 곳임을 짐작할 이는 많지 않다. 남은 것은 그야말로 무각사 정도다. 그렇게 이곳은 과거를 갈아엎고 전혀 다른 세상, 드높은 스카이라인을 따라 조명이 24시간 휘황하게 번쩍이는 신흥 핫 플레이스로 변모했다.


춘심春心, 봄과 같은 마음

1980518일 일요일 밤 9, 기차가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승객들이 승강장을 지나 개찰구로 나설 때만 해도 아무도 이상한 걸 몰랐다. 평소 같으면 복작복작했을 역 앞은 기이하게 어두웠다. 도로가 휑했고, 버스도 택시도 다니질 않았다. 집에 갈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중에 전옥주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손녀이며 경찰서장의 딸로 태어나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관변단체(대한무궁화중앙회의 명승희 총재가 그의 이모다) 일을 돕던 서른두 살의 옥주씨는 집에 쉬러 온 길이었다.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자가용에 합승했으나 상무대 검문소에서 제지를 당했고(“지금 시내로 가면 다 죽는데 아가씨가 어딜 가?”), 그는 집 근처인 국군통합병원까지만 가면 된다며 다른 트럭을 얻어탄다. 어렵게 귀가한 전옥주는 가족들에게서 사정을 들은 후 만류를 뿌리치고 도청까지 걸어 나온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11, 금남로에선 시위대와 계엄군이 여전히 대치 중이었고, 한쪽에는 잡혀간 사람들의 벗겨진 신발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발가벗겨진 시민과 학생들은 게엄군의 조롱 속에서 기합을 받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시위대를 돕던 그는 곧 가두방송에 뛰어든다. 어릴 때부터 창과 웅변을 배워 뱃심이 좋기도 했고, 쏟아지던 최루탄 속에서 헉헉대며 전두환은 물러가라, 광주를 지켜내자 소리치는 젊은이들이 남 같지 않았던 거다. 이때부터 전옥주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제대로 된 장비가 없어 가까운 주민센터에서 가진 돈 7만 원을 주고 앰프와 스피커를 떼 차량에 실으며 그는 폭도가 된다(실제로 이 일은 공무원을 협박한 특수공갈죄로 둔갑했다). 밤새 도로를 누비며 피해 상황을 알리고 도청 집결을 호소하던 옥주씨는 21일 아침, 끔찍한 광경과 마주친다.

 

시민들이 광주역에서 날라온 리어카에는 너무도 생생한 시신 2구가 얼굴이 뭉개진 채로 뉘어져 있었다. 전옥주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서슬이 퍼런 계엄군과 대치하며 일갈한다. “세금으로 먹고사는 군인들이 어떻게 시민을 죽일 수 있습니까?”, “당신들은 사람도 아닙니까?” 반박할 수 없던 계엄군이 마지못해 도지사와 시민 간의 협상을 주선하지만, 군대를 물리겠다던 도지사는 숨어버리고, 계엄군도 장갑차를 밀어붙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표로 나섰던 전옥주만 애꿎게 간첩으로 몰린다(“간첩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을 잘 할 리가 없다!”).

이웃의 증언으로 의심을 벗고 다시금 육성 방송을 이어갔는데, 시민군 사이에 숨어든 군경의 협잡에 또다시 간첩으로 지목되며 26일 기어코 중앙정보부 광주분실로 끌려가고 만다. 밤낮없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군부는 전옥주를 남파간첩으로 꾸미려 시나리오를 썼다. 점포를 내려던 오빠의 저축액은 난데없이 공작금이 되었고, 가방에 있던 권총 모양의 열쇠고리는 북한산 특수 무기로 압수당했다.

 

날조된 질문에 그렇다고 할 때까지 송곳으로 무릎을 쑤시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갈겼으며, 군홧발로 팔다리를 짓밟았다. 온 장기가 다 망가지고 하혈만 해도 3년 넘게 이어졌을 정도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성고문도 서슴지 않았다(참고로, 5·18 당시 군경의 수많은 성범죄들은 단죄받기는커녕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중앙정보부 광주분실과 상무대 영창, 국군통합병원과 광주경찰서를 오가는 몇 달 동안 옥주씨는 모란봉에서 2년간 남파교육을 받은 모란꽃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정권 상부에서는 5·18을 간첩이 일으킨 폭동으로 만들기보다, 전두환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과 운동권 일당이 작당한 내란으로 써먹길 바랬다. 결국 전옥주의 혐의는 간첩죄에서 내란죄로 재구성된다.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며 자그마치 15년형에 처한다.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는 걸 정권도 알았는지 그는 1년 만에 풀려난다. 끔찍한 고통에 심신이 갈가리 찢겼던 옥주씨가 출소 후 행복을 되찾았어야 옳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문은 석방 후에도 연장된다. 그와 가족을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어 24시간 도청하고, 직장과 집에는 아무 때나 들이닥쳐 생활할 수 없게 헤집었으며, 신고 없이 주소지에서 10리만 벗어나도 체포했다. 그 등쌀에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도 뇌종양에 걸려 1986년 세상을 버렸고, 내력을 알고 결혼했던 남편까지 결국 그를 떠났다. 전옥주 역시 신경쇠약, 실어증, 공황발작, 폐소공포증을 겹쳐 앓으며 지옥의 나날을 보냈다. 자살시도만 여러 번 했고, 어느 날엔 쥐약 여섯 병을 한입에 털어 넣기도 했다.

생전 당신의 얼굴 사진이 간혹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건 그 후유증 탓이다. 그러나 국민이 잠자코만 있지는 않았다. 감옥은 이미 양심수들로 가득 찼고, 정권의 탄압이 갈수록 더해졌는데, 대학생들은 데모를 멈추지 않았다. 넥타이부대까지 집회에 합류하면서 1987, 6·10 항쟁으로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양김의 분열로 전두환의 친구이자 12·12 쿠데타의 또 다른 주역인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주화의 흐름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광주 청문회가 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방송 3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옥주씨는 여기에 증인으로 참석해 군부와 관료의 거짓말을 낱낱이 폭로한다. 간첩이다, 범죄자다, 동네에서조차 손가락질 속에 숨어 살았던 그가 청문회 후 집으로 돌아오자 이웃들은 떡과 막걸리를 준비해 당신을 위로하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장한 일을 했는데 왜 감추며 살았느냐고, 그동안 오해한 게 정말 미안하다고. 그 뒤로 전옥주는 5·18여성동지회를 만들어 민주화운동 당시 여성들의 활약을 조명했으며, 시의원 선거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5·18 때만 망월동 묘지를 찾는 정치인들 앞에서 호령한 적도 있다. 똥폼 잡지 말라고. 5·18은 광주 시민,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 국민 모두의 상처이자 명예라고. 이 일이 금배지를 다는 데 동원되거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쓰여선 안 된다고. 파킨슨병을 앓는 와중에도 암매장된 행방불명자들을 찾아 이름을 돌려주는 일에 매진했던 그녀는 2021216, 모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 계엄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여자, 광주의 밤을 지키던 파수꾼, 제가 불러모은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면서 평생토록 죄책감에 시달렸던 사람, ‘모란꽃은 졌다.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저는 (그대로) 할 겁니다, 또다시.”라고 단언하던 전옥주의 본명은 춘심(春心)이다. 봄과 같은 마음. 연약한 듯해도 결코 꺾이지 않는 계절은 매년 오월이면 약속처럼 다시 광주의 들판을 휘붉게 뒤덮는다. 높이 선 모란의 꽃대가 바람에 잎을 부비며 내는 소리가 마치 그때의 음성인 것 같아 종종 저릿해진다.

 

지금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도청으로 모여주십시오.”

계엄군 아저씨,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입니까?”



5·18자유공원

예비검속자들, 그리고 무고한 시민과 항쟁에 참여한 시민군이 잡혀 끔찍한 폭력·고문으로 심신이 망가진 장소, 옥주씨에게는 날조된 죄명을 덧씌워 15년 형을 선고한 장소가 한자리에 있다. 상무지구 남서편의 5·18 자유공원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아주 오래 돌아왔다. 이 공원은 상무대 영창(더 정확히는 상무대 내의 헌병대 영창)과 군사 법정을 원래의 자리에서 100m쯤 옮겨 원형을 복원한 곳이다. 연행자들이 혹독한 취조를 받았던 헌병대 내무반과 임시 취조실로 물고문을 자행한 현장이기도 한 헌병식당, 고문 수사와 재판을 지휘한 계엄사합동수사본부가 임시본부로 사용하던 헌병대 본부사무실, 군사재판을 열었던 임시법정과 감방 6곳을 꼼꼼하게 재현했다. 그러니까 5·18 때 살아남은 사람들을 정신까지 말살하려 했던 곳, 지상에 구현한 지옥이라 할 수 있겠다. 세월은 흘러서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고 또 그날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정치가가 여럿,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내란수괴살인등의 혐의로 법정최고형을 선고받았으며, 5·18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저항권으로 추인받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망월동에는 따로 국립묘지도 조성되었다. 상무대는 옮겨가고 그 자리는 광주 최고의 신도시로 변했다. 이 모든 일은 40여 년 전, 군대의 총칼에도 시민들이 물러서지 않았던 그 일요일에서 비롯했다. 그날 앞뒤로 있었던 수많은 일들, 광주 전남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항쟁, 지금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극우의 준동까지 그 세세한 공방들이 이 자유공원 곳곳에 오롯이 담겨 있다.






가끔 볕 좋은 날이면 인근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이곳에 현장학습을 나오는데, 그러면 아이들이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도시락을 먹는 한가로운 풍경과 만나기도 한다. 그때 도청에 남았던 이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이런 사소한 평화였을 것이어서 바라보다 보면 괜스레 목이 멜 때가 있다. 광주 최고의 도심인 상무지구,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상무지구, 밤이면 번쩍번쩍 번화한 상무지구를 거닐 때면 가끔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어떤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웠음을, 어떤 이들은 실제로 목숨을 바쳤음을, 살아남은 사람들도 결코 편해질 수 없었음을.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5공을 살고 있을 것임을, 이는 곧 미얀마임을. 민주주의는 흘린 피를 먹고 자랐음을, 지금의 번영 역시 그 핏값으로 시작되었음을. 전옥주씨, 아니, 춘심씨의 명복을 빈다. 당신이 못다 이룬 것은 우리가 마저 할 터이니, 이제 그곳에서라도 부디 편안하시기를. 모란꽃 지천으로 흐드러지는 광주의 오월을 기리며, 끝으로 시 한 편을 붙인다.

여기는 반도의 변방입니다
이정표를 잃고 리어카는 계속 돕니다
저는 붉은 꽃이 핀 화분을 옮기는 중입니다
착검이 거친 뿔처럼 자랄 때
아우와 누이들이 들꽃으로 피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모란꽃이라 부릅니다
나는 따뜻한 남쪽에서 피는 꽃입니다.
제가 살아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울창하게 살아 있어서 미안합니다
불온한 목숨을 증여합니다
무성한 저의 숲을 거닐어 주세요
풀숲에 몸을 뿌리째 묻고
대답 없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곳
화분은 작은 숲이 되었습니다
숲들이 모여 한 계절이 됩니다
행진곡이 아니어도 좋아요
아리랑을 불러주세요
입마개를 걷고 노래를 불러주세요
리어카가 광장을 돕니다
계속 돕니다

* 고(故) 전옥주 님의 연설에서 인용
- 송용탁, <야생화, 故 전옥주를 외치며> 시 전문, 
 2021년 5·18 문학상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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