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로,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
작성일 : 2021-12-28 조회 : 481 | |
지명의 말풍선 이름은 세태(trend)를 반영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지만, 그저 흘려버릴 수만 없는 것들이 걸리고 모이고 고여서 마침내 하나의 이름이 된다. 충장로(忠壯路)도 그렇다. 조선 시대까지 이 자리엔 광주 읍성의 북문이 있어 북문 안/밖거리로 불리다가, 한일강제병합(庚戌國恥, 1910) 이후 일어로 중심가를 뜻하는 본정통(本町通, 혼마치도리)이 되었다. 도청과 헌병대본부, 경찰서, 검찰청 등 일제의 통치기구가 근방에 모여 있어 그 위세를 업고 일본인들이 상가를 만든 게 지금의 충장로 1, 2, 3가 구역이다. 나라를 잃었으나 자존심만은 잃지 않아 그 시절 조선인들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듯 현재의 충장로 4, 5가에 독자적인 상점가를 개척했다. 해방 이후로 일본인이 떠난 1~3가를 접수하고 지명을 바꿔 1947년 이 길은 비로소 충장로가 된다. 여기서 충장忠壯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시호다. 그러니까, 충장로는 그 연원과 지명에서부터 ‘저항’의 말풍선을 달고 있다. 20세기 광주의 대표적인 번화가, ‘매년 최고기록을 갈아치우는 전라도 땅값 1위 지역’, ‘호남 경제 1번지’인 이곳이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근원지가 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이 길은 외세, 독재자, 군대를 향해 한목소리로 ‘아니야!’ 라고 외쳐왔다. 숱한 희생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과 도시, 지역, 국가의 존엄을 지켜냈다. 사실 충장로는 정치 공간이라기보다 생활공간이다. 장장 100년 동안 광주 사람들은 여기서 보고 듣고 입고 먹고 마시며 울고 웃었다. 도청이 이전하고, 터미널이 옮겨갔으며, 기찻길마저 끊기면서 최고의 상권이라는 영예를 상무지구에 넘겨주고 말았지만, 충장로를 충장로답게 만든 이들은 아직 동네를 떠나지 못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새로운 점포들과 양립하며 여전히 어떤 가치를 지키고 있다. 그 묘한 공생이 충장로의 특징이고 매력이고 가능성이기도 하다. ![]() 오래된 가게 100년의 거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 시간, 다시 말해 ‘전통’에 있을 것이다. 임인자, 황지운이 쓰고 충장상인회가 발간한 《충장로, 오래된 가게》는 세대를 넘어선 점포들의 사연을 살갑게 소개한다. 일본인 전용 영화관에 맞서 1935년 ‘민족극장’을 표방해 세워진 광주극장, 1946년부터 2대째 가업을 이어온 ‘전남의료기상사’, 1973년 영안잡화점에서 시작해 본전제과를 거쳐 중국음식점으로 자리잡은 반백년 역사의 ‘영안반점’, 화재로 가게가 불탔는데도 이웃과 장애인단체의 도움으로 생업을 재개한 ‘남양통닭’(현재는 ‘남양닭칼국수’로 개명), 일신모자, 도미패션, 쎄느양복점, 노틀담제화, 브론디패션, 아리랑주단, 한양모사 등 30년 이상 뚝심있게 영업을 이어간 58곳의 점포는 광주동구청이 헌정한 ‘오래된 가게’ 동판과 더불어 오늘도 빛난다. 이외에도 충장로에는 숨은 내력을 자랑하는 명점들이 수두룩하다. 전국 5대 빵집으로 꼽히며 공룡알빵과 나비파이로 유명한 충장로 우체국 앞 ‘궁전제과’, 70년대부터 노래로 행인들을 위무하며 거리의 뮤즈역을 도맡아 온 ‘25시 음악사’, 단골이었던 학생들이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다는 상추튀김의 명가 ‘은성김밥’, 1987년 고전음악감상실로 개업하여 37년간 클래식과 커피로 세월의 무게를 담지한 ‘베토벤음악감상실’……. 이쯤되면 충장로를 고리타분한 노포의 거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충장로 4,5가가 공방과 매장을 겸하는 오래된 가게들로 단골손님을 애틋하게 품어주고 있다면, 중앙로 건너 충장로 1~3가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패션의 거리’다. 캐주얼과 디자인샵, 신흥 맛집과 카페, 디저트전문점과 프랜차이즈 매장들까지 촘촘히 늘어서 새롭고 통통 튀는 감성을 선보이며 1020 세대를 꾸준히 끌어들이고 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추억의 충장축제’가 다채로운 컨셉별 퍼레이드, 테마거리 조성, 달빛캠핑 등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은 난장을 펼치며 다양한 세대들을 섞어놓는데 성공하면서 충장로는 시대를 거스르며 조금씩 더 푸르러지는 중이다. 나이든 밥집 잘 되는 식당의 포인트는 ‘한번 먹어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다시 먹어보고 싶은 곳’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저런 요소로 한 번은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으나, 여러 번 오게 만드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매년 화제가 되는 음식점은 많지만 몇십 년을 두고두고 번성하는 밥집은 드물다. 충장로의 묘미는 골목마다 나이 든 식당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가게는 매장이나 공방만이 아니다. 횟집 동해바다, 중국집 신락원, 일본음식점 쌍학과 청하일식, 백반집 예향식당과 정애네집, 메밀국수집 청원모밀, 화신모밀, 산수모밀, 돼지갈비집 민속촌, 볶음밥집 월계수식당, 육전집 대광식당……. 여행자들은 보통 스마트폰을 열어 맛집을 검색하고 리뷰를 꼼꼼히 살피는데, 그런 행위는 밥집을 찾는 일이 일종의 ‘모험’이거나 ‘공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실패’하거나 ‘폭망’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걱정을 내려놓아도 좋겠다. 이곳은 나이 든 식당, 바꿔 말해 주민들의 검증을 거쳐 믿을 수 있는 밥집들이 즐비하니. 깜찍한 인테리어에 독특한 식기, 묘한 빛깔의 조명까지 갖춘 신흥식당들이 인스타그램의 위세를 업고 세계를 호령하고 있으나, 충장지구만은 어림없다. 되려 그 반대. 낡은 간판에 옛 시절 그대로인 실내장식, 큼지막하게 붙여둔 외부 메뉴판이 붓글씨체라면 그 집은 틀림없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이 거리는 그런 맛집들의 숙성된 격전장이다.
해남식당(동구 중앙로 149-5, 062-432-1040)도 그중 한 집인데, 특미는 조개 해장국이다. 꽃게를 넣고 된장을 엷게 풀어 말갛게 우러낸 육수에 바지락을 와, 소리가 날 정도로 듬뿍 넣어 한소끔 끓인 후 실파를 올린 조갯국을 낸다. 주문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뚝배기가 나온다. 끓여둔 국을 퍼오는 게 아니란 뜻이다.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사발에서 국물을 한 숟갈 떠서 그 위에 조갯살을 한 점 올려놓고 후후 불어 입에 넣으면 이상하게도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에 씐 것처럼 말없이 숟가락질만 하게 된다. 찬도 하나하나 맛있고, 밥도 괜찮지만, 구수하면서도 살짝 칼칼한 이 국물은 스펀지처럼 시간을 빨아들인다. 그릇을 바닥까지 비우고 나면 거짓말처럼 한 식경이 지나있다. 도대체 내가 무얼 먹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단골 한 분은 ‘술꾼 된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맛’이라고도 했는데, 사실 음주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요리다. 개업 후 30년이 지나도록 손님들이 줄을 서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보증하지만, 해남식당만이 특별한 건 아니다. 거론한 다른 밥집들도 다르지 않다. 따로 비법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풍미가 다르고 손맛이 깊다. 튀지는 않지만 진득한 맛집들이 고샅길마다 그득하다. 당신은 그저 취향따라 메뉴만 고르면 된다. 이렇게 마음 편한 식당가가 또 있던가. 말하자면 충장로는 길 따라 펼쳐놓은 극상의 푸드코트다. 게다가 값까지 헐한 편이다.
![]()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충장로가 오직 소비의 교차로, 미식의 보급로, 자본의 일방통행로인 것만은 물론 아니다. 각별한 공간도 여럿이다. 금남로와 중앙로 사이에 좁장한 금남로공원도 있고, 광주천 건너 널따란 광주공원도 있다.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사였던 절터를 일제 강점기 신사(神社)로 바뀌었다가 최초의 광주시립공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5·18 당시에는 시민군이 사격훈련을 하고 순찰을 하며 계엄군에 맞서 치안을 지키던 항쟁의 대치본부로 쓰였다. 밤이면 포장마차가 쭉 늘어서 ‘광주공원포차’로 더 유명한 곳이지만 입구의 5·18 사적비와 김군 동상을 눈여겨 봐주면 더 특별해지겠다. 충장로 우체국 옆의 청소년 삶 디자인센터 역시 상점가의 허파 같은 곳이다. ‘삶디’라 불리는 이곳은 청소년이 스스로의 삶을 그리고 표현하는 전용시설로 일종의 해방구로서 기능한다. 우체국과 삶디 사이의 골목에는 누구나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이어져 있으며 삶디 곳곳에도 쉼터가 있다. 또 한 곳, 충장로 한복판에는 아담하지만 고고한 장소가 있다. 호남동성당이다.
“군이 아무리 사태가 위급했더라도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인을 향해서 공중에서 민간인을 향해 위해를 가할 수 없고 대항할 수도 없어요. 근데 군인들은 최첨단 무기로 지상의 민간을 향해서 발포를 했다 이거야. (나는)그 발포를 본 목격자야. 피터슨 목사도 그것을 적나라하게 발사한 것을 보고는 망원렌즈가 없는 일반 카메라로 포착을 했어요.”
항쟁 당시 자청해 나선 시민수습위원이었으며 내란음모 핵심동조자로 징역살이까지 한 故 조비오신부는 청문회와 법정에서 거듭 증언한 바 있다. 계엄군이 헬기를 동원해 지상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이 발언은 자위권, 정당방위 운운하며 대국민 학살을 합리화하려던 전두환 일당의 정체를 까발린 중차대한 반전이었다. 참고로, 조신부가 돌아가신 뒤 전두환은 제 회고록에서 그를 사탄으로 비하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누가 누굴 보고 악마라는지 모르겠다. 악마가 절대 부인 하는, 헬기의 기총소사를 목격한 장소가 바로 호남동 성당이다. 하지만 성당과 시민군 훈련장, 청소년 해방터만이 성스럽고 고고하며, 반대로 상점가가 속되고 비천한 건 아니다. 앞선 책 <충장로, 오래된 가게>는 그 점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 “저희 집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스테인레스 세숫대야에 텅하고 총알이 들어와 빙그르르 도는데 정말 무섭고 화가 났지요. 다 말로 못합니다.”(전남의료기상사 김우평씨, 《충장로, 오래된 가게》, 42쪽, 소년의서, 2020)“두들겨 맞고 칼에 찔려서 사람 싣는 것도 봤고, 도청 앞 관도 보고 총에 맞아 쓰러진 것도 보고, 공수부대들이 머리 맞아 터진 사람 끌고 가는 사람도 보고 대검 찔린 사람도 보았죠.”(삼영양복점 신한수씨, 앞의 책 43쪽)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들어오게 하고 가게 셔터를 닫았어요. 그랬더니 공수부대가 이렇게 착검을 넣으니까 유리문이 쫙 깨졌어요. (당시) 사장님이 젊은 사람들은 위험하니 빨리 (집에) 들어가라 했어요. 그래서 조흥은행 앞으로 들어오는 택시가 있어서 손을 들었는데, 마침 아는 선배가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공수부대가 나더러 내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양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 선배가 ‘내 동생이다, 학생 아니다”라고 해서 겨우 살았지요.“(전병원 양복점 전병원씨, 《금남로·충장로의 역사와 삶》, 224쪽, 광주시립박물관, 2017)읍성의 중심가였고, 도청의 길목이었으므로 충장로는 그 지독한 시절을 바로 곁에서 함께 한 동료이며 목격자이고 또한 증인이기도 했다. 점주들의 증언은 이 밖에도 허다하다. “시민군 트럭에 여직원이 훌쩍 타서 함께 참여”(남양통닭 이철환씨, 《충장로, 오래된 가게》, 42쪽, 소년의서, 2020)하기도 했고, 어떤 노인은 끼고 있던 금반지도 제공(노틀담&바이슨 제화점 양종찬씨 구술, 앞의 책 43쪽)했다. 계엄군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곤봉에 머리가 깨진 일식집 사장, 음료수를 박스째 건네준 슈퍼 주인, 항쟁은 진압되었어도 매일 도청에 나가 눈시울을 훔치던 상인도 있었다. 성당이든 상가든 공원이든 광주는 광주였다. 그때 광주에 성속成俗의 구별은 없었다. 어떤 이유로든 당신이 충장로에 들른다면, 그냥 한 번 둘러보길 바란다. 그 수많은 가게를, 지나가는 행인을, 멀쩡한 골목과 담벼락을. 그리고 딱 한 번만 이 거리를 돌이켜 생각해 봐주길 희원한다. 이 시가지를 걷는 게 목숨을 건 일이었음을, 그래서 너나없이 댓가없이 서로를 돕고 지켰음을, 그것이 도시 전체의 저주가 된 다음에도 이들은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음을. 충장로 음반가게에서는 외부에 달아둔 스피커로 가끔 옛 노래를 들려준다.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그저 지나간 유행일뿐인 어떤 가사가 종종걸음을 멈추고 한 시절을 되돌릴 때가 있다. 외로울 때면 생각하세요 아름다운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나 이렇게 불빛 속을 헤맨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몰래 발길이 멈추는 것은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 아아아 아아아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박건호 작사작곡, 장은아 노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Writer 정원선 에세이스트 Photo 조은영 이규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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