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재그 캠퍼스 산책 | |
작성일 : 2021-12-29 조회 : 560 | |
쉽게 그 존재를 잊고 살지만, 가로수는 거리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구조물과 차량이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산소로 내뱉고, 미세먼지를 걸러 공기를 맑히며, 때로는 눈비와 따가운 햇볕까지 막아준다. 지구온난화에 맞서 기온과 습도를 조절하는 천연 에어컨이기도 하다. 한 그루의 길 나무도 공기청정기이며 우산이자 그늘막이고 냉풍기일진대, 여러 식물이 모인 숲은 육상의 바람길이고 도시민의 숨통을 틔워주는 지역의 허파이면서 그 이상 생물 다양성의 요람이며 환경위기의 전조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초록빛 카나리아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숲이 인간에게 기대는 것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이 대차대조표는 오래전에 마이너스로 변했고, 지연이자가 줄줄이 달린 청구서가 우편함에 쌓인 지 한참 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금 납부를 미루고 있다. 대학도 하나의 숲이다. 효용을 넘어 공부하겠다는 갸륵한 생각들이 한데 모인 우뚝한 삼림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지성이 부화하는 우듬지이며, 학문이라는 인간 고유의 사유체계를 기르는 너른 초원인 까닭이다. 그런데 사실, 대학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숲이기도 하다. 어디든 빈 땅만 있다면, 아니 낮은 건물을 갈아엎어서라도 고층 빌딩을 올려대는 작금의 세태에서 대학은 학생의 배움터일 뿐 아니라 지역민의 산책로이고, 울울창창한 나무들과 만나는 꼬마 식물원이며, 미생물과 수중동물들의 활동공간인 습지이고, 곤충과 새와 유기동물들의 쉼터이자 또 사육하지 않는 동물원이기도 하다. 대학이 학생의 거처만은 아니다. 뜻밖의 많은 존재들이 학적없이도 대학에 기대 살아간다. 대학은 하나의 숲이 틀림없다.
청춘의 숲, 봄이 가장 먼저 찾는 곳 국립 전남대학교(용봉동 광주캠퍼스, 이하 ‘전대) 역시 광주 구도심에 자리한 숲이다. 물론 빛고을 서편에 무등이라는 커다란 임야가 있지만, 33만 평에 달하는 너른 부지와 속속들이 우거진 수풀 덕분에 전대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소임뿐 아니라 주민들의 공원이자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 확장을 거듭하는 대도시의 숨구멍 몫을 해왔다. 계절 따라 다채로운 때옷을 갈아입는 캠퍼스는 여행자에게도 ‘기깔난’ 친환경 둘레길이다. 전대 캠퍼스 전체가 광주 북구의 크넓은 숲이라 할 수 있으나, 학교 내부에는 잘 가꿔진 혼합림이 한 군데 있다. 전대의 서쪽 끝, 용봉동 휴먼시아 아파트와 치과병원 사이에 위치한 ‘전남대 수목원’이 그곳이다. 학교 정문을 인상적으로 호위하는 메타세쿼이어 나무들은 여기서도 입구를 지키며 한층 더 우람하게 열병식을 벌이고 있다. 까마득히 곧추선 나무들이 햇살을 쪼개 지상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운데 표표히 흔들리는 키 낮은 풀꽃들 사이를 거닐고 있노라면 순간 현실감을 잊을 정도다. 누군가 전하길 빛고을에서 봄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곳이란다. 그러니 또한 겨울이 제일 늦게 도착하는 곳이기도 하겠다. 푸릇한 젊음으로 들끓는 캠퍼스 안에서도 이 화원은 가장 푸르른 정점이다. 전대라는 청춘의 숲을 순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계절에 따라, 또 목적과 취향에 따라, 때로는 기분과 공기를 따라 수백 가지 경로를 만들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지성’의 열쇳말로 코스를 그리고자 한다. 일찍이 캠퍼스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캠퍼스를 정거장으로만 삼지 않았던 이들, 치열한 고민과 다부진 실천으로 학교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들과 함께 걸어보려 한다. 괜히 어렵고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재학생과 주민이 평소처럼 늘 산보하는 길인데 거기에 이름이 붙었을 따름이다. 그 이름들을 길라잡이 삼아 전대라는 초록의 숲, 인간의 숲, 사유의 숲, 울림의 숲을 거닐어 보자. 출발점은 학교 정문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전남대 민주길 5·18민주화운동 사적 제1호, 다시 말해 5·18의 발발지인 전대 정문으로 들어와 정면을 바라보면 메타세쿼이어 나무들이 차로 양옆에 줄지어 서 있다. 시선은 자연스레 늘어선 교목을 따라 도로 끝까지 쏠린다. 막히거나 굽은 데 없이 뻥 뚫려서 기분이 경쾌해지는 곧바른 길이다. 이름하여 ‘민주대로’다. 그 길로 300미터쯤 가면 용봉탑이 세워진 로터리가 나오고, 계속 직진해서 200미터쯤 더 나아가면 왼쪽으로 널찍한 광장이 펼쳐진다. ‘5·18광장’이다. 참고로, 그 오른편에 우체국과 카페, 문구점 등 생활편의시설이 자리한 건물이 학생회관이며, 그 옆으로 아담한 동산이 꾸며져 있다. ‘박승희 정원’이다. 5·18광장은 일없는 날이면 학생들과 주민들이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판판한 잔디밭이다. 그러나 평화가 위협받는 날이면 광장은 집회와 시위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1980년 봄, 사람들은 여기서 민주화의 깃발을 들었고, 그 깃발이 피로 물든 뒤에도 내려놓지 않았다. 세상이 바뀔 때까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독재 타도와 평화통일을 외쳐온 쩌렁쩌렁한 싸움터다. 본래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민주주의 정신을 본떠 높낮이를 메우고 평지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바꿨다. 그 곁의 박승희 정원은 1990년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한 그가 노태우 정권에 맞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자리이기도 하다.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길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하고 싶다”가 승희 씨의 유음이다. 소원대로 가을이면 이곳은 하늘거리는 꽃밭이 된다. 활짝 열린 꽃 이파리들은 바람에 나부끼면서도 한결같이 광장을 바라본다. 광장과 붙어 있는 주황색 정방형 벽돌 건물이 중앙도서관(색을 따서 ‘홍도’라 부른다)이고, 홍도를 따라 인문대학 쪽으로 돌면 ‘교육지표 마당’과 ‘김남주 뜰’을 연이어 만난다. ‘교육지표 마당’은 당시 학생이라면 무조건 외워야 했던 군대식 ’국민교육헌장‘에 반대하여 11명의 전대 교수들이 교육의 민주화와 대학의 자율성을 앞장서 주창했던 흔적이다. 이로써 11인은 전원 체포, 해직되었고, 그중 송기숙 교수는 실형까지 선고받는 지독한 고초를 겪었다. 처분이 온당했는지 비문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 인문대학 1호관과 경영대학 1호관 사이에 있는 ‘김남주 뜰’은 저항 시인이었던 그의 활동과 정신을 기리는 소공간으로 그의 대표작이자 민중가요로도 불렸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시문이 새겨져 있다. 1969년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장 파릇한 날들을 보냈다. 유신을 거부하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하고, 그 이상 적극적으로 해방과 투쟁을 조직하다 구속 수감되었다. 87년 6·10 항쟁에 이은 민주화 국면으로 복역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지만, 옥고로 얻은 췌장암으로 9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옥중 시편인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를 검색해 보면 김남주의 감성이 얼마나 엄결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윤상원의 숲에서 ‘김남주 뜰’에서 조금만 더 아래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사회과학대학이다. 그 한 켠에 5·18과 광주, 나아가 전 세계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윤상원의 숲이 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 ‘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이자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며, 영화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 민우(김상경 분)의 실제 인물이기도 한 그는 항쟁의 최후 순간까지 도청을 지키며 계엄군과 싸우다 총에 맞아 숨졌다. 겨우 서른 살이었다. 군대의 도청 진압이 예고된 1980년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들과의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군부를 향해 말했다. "북쪽을 향해야 할 군인들의 총이 왜 남쪽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렵다.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고, 물도 바닥나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반공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그렇게 몰고 가지 마라." 그리고 자신의 운명과 광주의 봄을 예언하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회견을 지켜보던 『볼티모어 선』의 브레들리 마틴 기자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윤상원의 행동에는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거의 광란 상태에 이른 것 같은 허둥거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었다. (중략)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잊지 않는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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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견을 끝낸 상원은 시민군을 집합 시켜 물었다.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시민군은 일사분란하게 “네!”라고 답했다. 그는 곧바로 도청 1층 무기고로 가서 최후의 실탄과 총기를 지급했다. 여성과 어린 학생들에게는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며 귀가를 부탁했다. 결국 그의 죽음은 이 땅 모든 이들의 큰 빚으로 남았고,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나라면 그날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이 무엇이든 스스로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날의 희생자들에게 응답한 것입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정치·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고, 나누고 협력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다시 오월의 전남도청 앞 광장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날, 도청을 사수하며 죽은 자들의 부름에 산 자들이 진정으로 응답하는 길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에서 발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 마치 천부의 제도처럼 여기는 직접/보통/평등/비밀선거나 구속적부심, 청문회, 집회 시위, 임의동행 거부 등은 하나같이 수십 년에 걸친 투쟁과 수천 명의 죽음, 수백만 명의 희생을 통해 가까스로 이뤄낸 결실이다. 5·18이 아직 가야 할 길도 멀지만, 최소한 여기까지 다다르는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윤상원일 것이다.
“당시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 파들은 마지막 회의에서 그날 밤만 넘기면 아침이 올 것이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강변했다. 그러나 사실 그날 밤 모든 젊은이가 나름대로 모여 ‘최후의 만찬’을 들었듯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그들은 적들이 진실을 영원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모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생매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징한 정신으로 그 자리에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의 진실을 깊은 땅속으로 감추어 자신들의 몸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진실로서 부활할 수 있도록 화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290~291쪽, 오월의봄, 2015 독일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장 파울은 말한다.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실패하는 것이다.” 사회과학대학 바로 밑에는 법학전문대학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출발점인 정문이 나온다. 법대 건물에서 정문까지 이어지는 소소한 오솔길이 ‘박관현 언덕’이다. 1953년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난 박관현은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입학한 해 6월 27일 송기숙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 지표’를 발표하고 전원 구속, 해직된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학생들은 ‘전남대 민주 학생 선언문’을 남독하고 ‘학원 자율화 실시’, ‘연행 교수 석방’, ‘학원사찰 중지’ 등을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에 들어간다. 관현은 이로써 현실에 눈을 뜨고 학생운동과 지역활동, 들불야학에 뛰어들게 된다. 1980년 4월, 아직은 비극을 몰랐던 봄, 그는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라는 구호로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박관현이 유세를 벌이면 1만여 학생들이 운집해 호응하는 일대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압도적 지지로 총학생회장이 된 뒤에도 ‘기본과 원칙은 언제나 사람이다’란 신념으로 늘 주변을 보살폈다.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교수실에 못을 박는 행사에서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서글픈 현실을 먼저 반성하였고, 밤샘 단식 농성에서는 추위에 떠는 후배를 위해 학생회실 커튼을 뜯어 이불 삼아 덮어주기도 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비상 학생총회는 5월 8일부터 13일까지 학내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5월 14일에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2만 명이 넘는 시민들과 함께 경찰의 호위까지 받으며 평화시위를 펼쳤다. 심금을 울리는 연설에 탁월한 역량을 보인 박관현은 15, 16일에도 집회를 이어가면서 ‘광주의 아들’로 불렸다. 5월 17일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그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로 광주에서 빠져나온다. 전국을 떠돌며 위장 취업하며 숨어 지냈지만, 도청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다. 현상금에 눈이 먼 공장 동료의 밀고로 1982년 4월 체포,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참여하지도 못한 5·18의 중요 임무를 맡았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는다. 박관현은 교도소 내에서도 광주의 진상규명과 재소자들의 처우 개선을 주창하며 무려 40여 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결국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으로 각혈하며 전남대 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친다. 향년 29세.박관현 언덕은 울림이 컸던 그의 삶을 형상화해 장대석을 비탈을 따라 물결 모양으로 차곡차곡 놓아 마치 소리가 퍼져가듯이 설계되어 있다. 고인을 기리는 비석은 마치 생전의 그가 포효하던 장면처럼 보인다. 서울 인근 공장에서 체포되어 끌려가던 관현은 경찰이 들이닥쳤을 당시 왜 도망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죄인도 아닌데 왜 피하느냐. 죄인은 바로 신군부다. 5월 진실을 밝혀야 한다.”
전남대 민주길 2 글에서 밟은 코스와는 반대로, 학교 정문에서 박관현 언덕, 윤상원 숲, 김남주 뜰, 교육지표 마당, 박승희 정원을 돌아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전남대 민주길(https://518trail.jnu.ac.kr)의 첫 길인 ‘정의의 길’이다. 민주길은 이외에도 ‘평화의 길’과 ‘인권의 길’이 있다. 각각 1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돌아볼 수 있는 짧지만 아름다운 나들길이다. 이 글에서 굳이 ‘정의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 것은 대개의 답사객이 5·18을 동시대에 겪은 이가 아닐 거라는 판단에서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처한 자리와 상황에서 시대와 세계를 돌아본다. 그런 이유로 너른 그루터기에서부터 시작해 그 뿌리와 가지까지 차근히 돌아보자고 권유하고 싶었다. 전대는 결코 제쳐둘 수 없는 5·18의 진원지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초록길이자 순환의 거목이기 때문이다. 전남대 민주길을 둘러본 후에, 특히 ‘정의의 길’이나 ‘평화의 길’을 거닐은 끝에, 멀지 않은 전남대 수목원까지 내쳐 돌아보길 추천한다. 법대에서 농대를 거쳐 수목원에 이르는 길은 캠퍼스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시골길, 근대와 전근대를 아우라는 ‘오래된 미래’를 재현한다. 대학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갑자기 논밭이 펼쳐지고, 사방에서 수천 종의 식물이 자라나며, 주변의 생태계를 이루는 크고 작은 생물들과 조우할 수 있다. 목적지(수목원)에 다다르는 과정(경유로)이 절로 즐거워진다. 이제껏 그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운동(movement)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름으로 남은 당신들이 마침내 바랬던 것도 그 점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다다른 너른 수목원에서 우리는 다리를 쉬며, 한숨을 돌리고, 머리를 식히며, 생동하는 평화의 공기를 폐 속 가득 들이마실 것이다. 단단하게 솟은 관목들과 저마다의 향기를 펄럭이는 화초들, 머리를 낮춘 들풀들과 가만히 손을 뻗는 덩굴식물들을 넌지시 바라볼 것이다. 이 아늑한 숲도, 풀 나무들이 온 힘을 다해 운명과 맞서 싸운 흔적이다. 한 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후와 환경과 변이의 도전을 받는다. 그걸 이겨낸 이들만이 한 살이를 보내며, 생을 마감한 후에도 유전자를 남기고 이웃의 거름이 된다. 말하자면 숲은, 저마다의 주장을 간직하면서도 공진화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생명의 대극장이다.
정문 앞 ‘민주대로’는 곧게 뻗어있지만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도, 역사도 직진한 적은 없다. 정의와 평화, 인권으로 가는 길은 멀고, 때로는 격한 반동과도 마주친다. 결국 인간은 일희일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세상은 갈수록 더 나아지는 게 아닌가? 그런 의문들이 삶을 괴롭히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당신이 광주에 있다면 못내 속을 끓이기보다 전대로 나와 내키는 대로 걸어보길 바란다. 지독한 모순의 고통을 몸으로 끌어안은 흔적이 꼿꼿하고 거뜬했는지 확인해 보길 원한다. 민주 길과 수목원을 지그재그 거닐며 숲이 숱한 위기와 질곡 속에서 어떻게 응전해 왔는지 헤아려 보길 희망한다. 전대라는 수풀은 초록의 숲이며 또한 인간의 숲, 사유의 숲이고 드넓은 울림의 숲으로서 당신의 물음에 응답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러했듯이.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밝혔듯,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세계는 그로 인해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나아진다. 그 모든 반동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보한다. 지금의 세상은 예전의 사람들이 일생을 바쳐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다. 노인은 다시 말한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혁명을 생각할 때 흔히 폭력, 군대 등을 떠올리지만, 많은 중요한 일을 해내는 것은 사실 폭력이 아니라, 군대나 군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중략)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투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종종 일종의 경험입니다. 공적 공간에서 육체적으로 한데 모이는 경험,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경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는 경험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힘의 경험입니다. (중략) 정신과 육체, 내면의 성찰과 사회의 결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도시와 시골, 개인과 집단, 이 양쪽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립하는 듯한 두 항이 (중략) 보행을 통해 하나로 연결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 리베카 솔닛,「걷기의 인문학」 9~11쪽, 반비, 2017.
Writer 정원선 에세이스트 Photographer 이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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