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경기장은 1965년 9월 3일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조로 건립되었다. 무등경기장은 당시 광주에서 규모가 가장 컸으며, 체육행사 이외에도 다양한 집회와 모임이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경기장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무등경기장 앞은 소규모 광장이 있었고, 차량의 이동이 많았다. 또한 전일방직과 일신방직과 인접해 있어 노동자의 밀집 거주지이기도 했다.
운전기사들은 어느 집단보다 5·18민중항쟁에 관한 소식을 신속하고 충분하게 파악했다. 운전기사들은 도심 전역이 생활의 터전이었으므로, 집회와 시위 그리고 계엄군의 진압 양상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운전기사들은 계엄군이 시위자를 색출한다며 택시와 버스를 세우고 승객을 연행 및 폭행한 것에 특히 공분했다. 계엄군이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택시도 공격했고, 승객은 물론 기사까지 폭행했다는 소식에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운전기사들은 중앙고속터미널 앞, 광주역 앞 등에서 소규모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다가 자신들이 운용하는 차량을 이용하여 항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많은 차량이 일시에 모여들면 계엄군이 어찌하지 못할 것이며,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운전기사들이 무등경기장 앞을 집결지로 선택한 것은 계엄군의 시선을 피하기 좋았고, 다량의 차량이 집결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일 오후 5시 무렵 무등경기장 정문 앞에는 200여 대의 차량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매우 보기 드문 광경이었고, 운전기사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이들은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본 대열은 임동을 관류하는 서림로를 따라 광남사거리로, 일부 차량은 광주역 방면으로 우회하여 광남사거리로 이동했다. 다시 하나가 된 차량 행렬은 금남로 5가까지 진출했다. 시민들은 대규모 차량 행렬과 운전기사들에게 뜨겁게 호응했으며, 계엄군의 저지선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무등경기장은 2011년에 철거되었고, 2014년 광주ㆍKIA챔피언스 필드로 재건축되었다. 따라서 5·18민중항쟁 당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다행히 정문 등 일부시설들이 보존되었다. 무등경기장 정문 사적비는 119안전센터 옆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운전기사들은 5월 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명명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