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야학은 1978년 7월 23일 광주시 광천동 소재 천주교회 교리실에서 탄생했다. 박기순과 신영일, 이경옥, 나상진, 임낙평의 대학생 강사(이하 강학)와 35명의 노동자가 모여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목적으로 만든 노동야학이었다. “들불”이라는 명칭은 유현종의 소설 들불과 미국의 노동운동 비사에 등장하는 ‘들불’이라는 명칭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들불야학은 1981년 10월 제4기를 마지막으로 해산하기까지 20여 명의 강학이 활동했으며, 150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강학으로 활동했던 주요 인물은 박관현, 윤상원, 김영철, 박효선, 박용준, 정재호, 전용호, 김경국, 서대석, 이영주 등이었다.
들불야학이 활동한 광천동 일대는 광주의 대표적인 공업단지였다. 윤상원은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임대하여 사실상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회운동을 도모했다. 5·18민중항쟁이 발발하자 들불야학 강사와 학생은 조직적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의 위원과 시민군 등으로 활동했으며, 당국에 통제된 언론과 방송을 대신했던 「투사회보」를 비롯해 각종 유인물을 제작했다. 첫 유인물은 5월 19일 윤상원이 제안하고 강학과 학생이 방안을 협의하여 간행되었다. 이들은 “선언문”,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 궐기문” 등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투사회보」라는 제하의 유인물은 5월 21일부터 발간되었다. 「투사회보」는 24일까지 들불야학 팀이 발간을 주관하고, 이후는 보위를 위해 도청의 항쟁지도부에게 이관했다. 항쟁지도부는 광주YWCA에서 「투사회보」를 이어서 발간했다. 그리하여 「투사회보」8호가 제작되었고, 다음 호부터는 「민주시민회보」로 개칭되었다. 비록 들불야학 전체로는 활동을 멈추었으나, (들불야학팀은) 25일 이후에도 자유의사로 항쟁에 참여하여 많은 이들이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
5·18민중항쟁으로 인한 들불야학 팀의 피해와 후유증은 막심했다. 윤상원과 박용준이 도청과 광주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에 항거하다 사망했으며, 박관현은 수배를 받아 구속되지 않기 위해 노동자 생활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안대와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박관현은 항쟁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옥중 단식투쟁을 하다 사망했고, 김영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신영일과 박효선은 병마와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처럼 들불야학 팀의 다수가 사망하거나 후유증을 앓았으나, 이들의 정신과 의지는 1980년대 광주ㆍ전남지역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들불야학당은 2004년 11월 노후화로 인한 붕괴 위험과 도시계획도로 개설을 위해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입구 벽체만 남았다. 5ㆍ18민중항쟁에 참여하여 많은 이들이 희생했던 들불야학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는 2013년 10월 17일 사적지 제27호로 지정ㆍ고시했다. 한편 2004년에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