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걷자

광주 사적지(29개소)



제9호 쇄도하는 사망자와 부상자들
전남대학교병원
광주 동구 제봉로 42

 전남대학교 병원은 의과대학과 뚜렷한 경계가 없이 사실상 같은 공간에 있다. 5월 18일 새벽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도 조선대학교에 배치된 제7공수여단 제35대대 병력 일부가 들어와 수색을 했다. 캠퍼스와 병원을 구분하지 못한 계엄군은 총을 들고 병동에까지 난입했고, 의과대학 학생들이 병원으로 도피하면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시위가 확산되고, 계엄군이 극단적으로 진압하면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경미한 부상자들은 중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중상자들은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상자들은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거나 연행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치료받기를 주저했고, 치료 중에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남대학교 병원에 부상자들이 쇄도한 것은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이루어진 직후였다. 병원 응급실은 사망자와 부상자로 이미 혼잡스러웠는데, 총상을 당한 초 응급 환자들이 물밀 듯 후송되어 온 것이다. 병원은 가동할 수 있는 의료 인력과 장비를 모두 투입하여 이들을 치료했으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의료인들은 병원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데 헌신했다. 수술실은 쉼없이 운영되었고, 응급실은 환자와 가족 그리고 치료를 지원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얼마 후부터는 의료 장비도 소진되어 곤란을 겪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수술용 산소의 부족이었다. 수술용 산소는 여러 경로를 걸쳐 이리공단에서 어렵사리 반송되었다. 또한 치료에 필요한 혈액을 조달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길게 줄을 이었다.

 
 전남대학교 병원은 항쟁을 위해서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5월 21일 오후 늦게 몇몇 사람들이 병원 옥상에 LMG 기관총을 설치했다. 이들은 도청의 계엄군을 공격할 작정이었는데, 병원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의 만류로 작업을 중단했다. 그럼에도 병원은 총탄세례를 받고 말았다. 도청에서 외곽으로 철수하던 계엄군이 전남대학교 병원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계엄군이 도로변을 향해 혹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향해 M16을 사격한 것이다. 응급실, 수술실, 원장실, 병동에 총탄이 들어왔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에는 시민군이 화순방면을 감시하기 위해 일명 ‘개나리 동산’에서 초소를 설치했다.
계엄군이 철수한 뒤, 전남대학교 병원에 있던 희생자의 시신들은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이후에도 의료인들은 부상자 치료에 매진했다. 시민군이 병원 경비를 서고 긴요한 일을 도와주는 상황에서도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정보를 수집해가고 있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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