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걷자

광주 사적지(29개소)



제6호 투사회보의 산실
광주YWCA 옛 터
광주 동구 중앙로 196번길 31-6(대의동 75)

 여자기독청년회(YWCA) 운동은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으로 혼란을 겪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22년 YWCA가 창립되었고, 같은 해 전남에서도 김필례가 중심이 되어 결성했다. 5·18민중항쟁 당시 사용하던 대의동 회관은 1960년 11월 연건평 338평에 4층으로 완공되었다. 회관에는 사회단체들의 사무실이 있었고, 상점도 입주해 있었으며, 1971년 6월에는 광주YWCA신용협동조합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YWCA 2층에는 1978년 3월경에 창립된 광주양서협동조합이 있었다. 양서협동조합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 설립되었는데, 일반적인 협동조합과 달리 사회운동과 연계되어 있었다. YWCA에 지식인과 학생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왕래했던 것에는 양서협동조합의 역할이 컸다.


 1980년 5월 17일 YWCA 대강당에서 박현채 선생이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비상계엄 확대 실시와 예비검속 그리고 계엄군의 진압 등과 관련하여 광주지역 어른들은 양서협동조합에서 대책을 협의했다. 계엄군이 YWCA에 진입한 것은 5월 19일이었다. 계엄군이 신용협동조합으로 들어와 박용준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2층의 양서협동조합으로 들어와 관련자를 끌고 가서 구타했다. 이를 지켜본 옆 건물 무등고시학원 수험생들이 야유를 보내자, 계엄군이 진입하여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 YWCA 회관은 각종 유인물의 제작과 대책 회의 그리고 대학생들의 집결지로 사용되었다. 신용협동조합 관계자들과 들불야학 청년들은 5월 24일부터 「투사회보」등을 제작했다. 민주인사들은 23일부터 이곳에서 수시로 수습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로 인해 YWCA 회관은 계엄군의 진압작전에서 중요 목표가 되었다. 5월 27일 새벽 YWCA 회관에서는 박용준, 이연, 김효석, 김향득 등이 계엄군에 맞섰는데,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에 의해 박용준 외 3명이 사망했고 29명이 체포되었다.
YWCA 회관 내ㆍ외부는 총탄 자국과 핏자국이 있었다.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은 505보안대로 연행되었고,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모진 고초를 겪어 국군광주병원에 입원했다가 공군 보안대로 이송되었고, 제31사단 영창에 수용되기도 했다. YWCA 회관은 1984년에 북구 유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1983년 1월 해체되었고, 항쟁의 현장은 사라졌다.



위치




주변 사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