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걷자

광주 사적지(29개소)



제5-2호 민주주의의 꽃, 광장!
5·18 민주광장
광주 동구 문화전당로 38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5ㆍ18민주광장 분수대에서는 ‘민족ㆍ민주화성회’가 개최되었다. 성회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으나, 시민들과 함께 한 행사였다. 5월 16일에는 분수대를 둘러싸고 횃불을 올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 성회에서의 약속은 5·18민중항쟁이 전개되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5ㆍ18민주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다시 개최하려 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5ㆍ18민주광장에 최후의 방어선을 설치하고 시위대의 진출을 방어했다. 5ㆍ18민주광장에서는 군용 및 경찰 헬기가 이착륙을 거듭하며 문서와 병력을 이동시켰다. 시위대가 5ㆍ18민주광장에 육박하자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했다.


 계엄군이 철수한 다음 날인 22일 아침부터 시민들은 5ㆍ18민주광장에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지난 며칠 동안 계엄군이 자행했던 만행에 대해 얘기하며, 계엄군을 퇴각시켰다는 것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진행될 상황에 대해 근심과 우려를 표명했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시민들은 5ㆍ18민주광장과 금남로의 잔해들을 청소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기원했다.


 22일 오후, 시민들은 5ㆍ18민주광장에 시신 18구를 안치하고,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수습위원회 대표들이 상무대에서 전교사와 협상한 결과를 발표했으나, 핀잔을 받았다. 시신들은 계속해서 5ㆍ18민주광장으로 운반되었다. 전남도청과 5ㆍ18민주광장 일대에는 희생자의 명단과 인상착의를 적은 벽보가 부착되었다. 희생자의 시신들은 입관 등의 절차를 걸쳐 상무관에 안치되었다.


 23일부터는 5ㆍ18민주광장 분수대를 무대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매일 개최되었다. 계엄군이 재 진입하기 전날인 26일 에는 오전과 오후에 두 차례 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종 정황을 알리는 자리였고, 이후 행동할 방향에 대해 공감을 구하는 자리였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보다 체계적이고 의미가 있는 궐기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궐기대회에서는 희생자의 장례비용과 부상자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이 이루어졌다. 종종 5ㆍ18민주광장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계엄사의 전단을 뿌리는 등 선무공작을 펼쳤다. 분수대 옆 시계탑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5ㆍ18민주광장은 1980년 5월 항쟁 이후에도 각종 5ㆍ18 관련 집회 및 시국관련 집회, 촛불집회 등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또한 1987년 7월 故 이한열의 망월동 5․18 구묘지 안장 이후 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의 유해가 광주로 향했으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망월동 안장에 앞서 5ㆍ18민주광장(전라남도청 앞 광장)에서 노제를 개최했다. 그러나 모든 희생자들이 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것은 아니다. 경찰 병력에 가로막혀 금남로 구)한국은행 본점 앞이나 구)광주지방노동청 앞 4거리 등에서 노제가 열리기도 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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