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오월을 걷자

광주 사적지(29개소)



제25호 시민 대표들과 성직자들의 대책본부
남동성당
광주 동구 제봉로 67

 남동성당은 1949년 12월에 광주시에서 두 번째로 창립된 천주교 교회이며, 1980년 5월 당시에는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신부였다. 남동성당은 광주 도심에 위치하여 5월 14∼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 일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민주성회와 거리행진 등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남동성당에서는 지역 인사와 성직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이 자주 개최되었다. 5월 24일 천주교 인사들과 홍남순 변호사 등은 전교사를 방문하고 협의한 결과에 대한 시민의 반응과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오후 3시에 도청에서 개최된 시민수습위원회에 합류했으며, 20여 명이 다시 남동성당에 모여 온건한 수습대책을 논의했다.


 5월 25일 오후 2시에는 홍남순, 김성용, 조철현, 송기숙, 명노근, 이기홍, 이종기, 조아라, 이애신, 장두석, 이성학 등이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참여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당면한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협의를 마친 이들은 김성용 신부와 송기숙 교수를 도청에 보내 상황을 파악했고, 4시경 모두가 도청으로 이동하여 부지사실에서 토의와 협의를 벌였다. 이 회의에서 김성용 신부가 제안한 4개항이 만장일치로 합의되었다.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이번 사태는 정부의 과오로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② 사죄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③ 모든 피해는 국가가 보상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④ 어떠한 보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5월 26일 김성용 신부는 도청의 항쟁본부 일부 관계자와 종교 인사들과 협의하고, 이들의 요청을 받아 상경했다. 김 신부의 임무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일이 성사되면, 김수환 추기경이 미국과의 관계를 중재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정부의 강경책을 완화시키고 적절한 수습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김성용 신부는 아홉 차례의 검문 끝에 5월 27일 밤 서울에 도착했으나, 이때는 도청이 계엄군에게 점령된 뒤였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해 다수의 사제들은 계엄당국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남동성당에서는 해마다 5ㆍ18 추모미사를 봉헌하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지역의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5·18민중항쟁에서 남동성당이 갖는 의미를 기념하여 2005년 5월 16일 사적지 25호로 지정되었다. 남동성당은 1981년 5월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5월 추모미사를 진행해오고 있으며, ‘남동 5·18민중항쟁 기념성당’이라는 별칭을 사용하며 그 의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위치




주변 사적지